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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부 - 평범한 뱀도 용을 만드는 이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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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MS별 분류
Etc
작성자
dataonair
작성일
2007-11-15 00:00
조회
3125



자바 개발의 1인자 이·창·신


특집2부 - 평범한 뱀도 용을 만드는 이무기가 된다

대한민국 자바 개발자 치고 ‘이창신’이라는 이름 한번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아파치 커미터, 오픈마루의 플랫폼 오프너, 『자바 서블릿 프로그래밍』의 역자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한 마디로 그는 자바 고수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하나.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겸손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원고를 맡기면 글발로 강연을 맡기면 촤중을 압도하는 놀라운 흡인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는 ‘고수’라는 말에 언제나 손사래를 친다. 심지어 아무 것도 모른 채 처음 이창신 씨를 만난 기자는 그가 별 볼일 없는 개발자인 줄만 알았을 정도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 나름의 자신감이나 자부심 같은 게 생기게 마련이고, 그런 것들은 다시 행동이나 말투, 눈빛 등으로 흘러나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처음 만난 이창신 씨에게서는 그런 것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고맙습니다’ 이 말은 그가 메일을 보낼 때 빼먹지 않고 말미에 붙이는 말이다. 고마울 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도 그의 이메일 마지막에는 반드시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붙는다. 도대체 뭐가 그리도 고마운 걸까 그 속에는 부처라도 들어있는 걸까 누군가 자신에게 악성 댓글과 같은 내용의 메일을 보내도 그는 그 답장의 말미에 ‘고맙습니다’라고 쓸지도 모르겠다.
그런 탓인지 이번 달 특집 기사를 맡기기 위해 만난 그는 자꾸만 빠져나갈 곳을 찾고 있었다. 도무지 ‘고수’라는 말을 이름 앞에 달고 뭔가를 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다. 결국 기사를 억지로 떠넘겼고 원고는 왔다. 분명 그에게는 다양한 비법들이 있을 것이다. 개발자들의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것들이 잔뜩 있을 텐데 결국 원고에서는 자신이 쌓아올린 공을 모두 다른 사람들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
어쩌면 그의 그러한 성품이 지금의 ‘이창신’을 만들게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그릇이 있게 마련이다. 이 그릇의 크기는 ‘이제 나는 뭔가 이루어 냈다’거나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는 순간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이러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게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기에 그의 그릇은 무한하게 커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이창신 씨의 입을 통해 자신이 성공하고 유명해진 이유에 대해 들어보자.


글 | 정희용 기자 flytgr@imaso.co.kr·사진 | 염정호 실장


이창신 iasandcb@gmail.com|오픈마루 스튜디오에서 플랫폼 오프너(Platform Opener)로 일하고 있다. 요즘은 얼마 전 오픈한 스프링노트와 새로운 프로젝트들 탓에 하루에도 여러 개의 언어와 프레임워크들을 사용하는 멀티플레이어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일산을 갔다 오는 길에 쓰리라 마음을 먹었다. 청탁은 받은 것은 10월 초, 담당 기자는 ‘고수’라는 말을 필자에게 건넸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또’라는 생각이 든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나 스스로가 고수라는 말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이다. 다른 하나는(내가 그 말을 싫어하는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나는 일반적인 개발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 온 것은 사실이다. 혹시 그 과정 탓에 내가 남들이 보는 고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극본을 쓰는 것이었다. 프로그래밍 또한 창작이라는 같은 궤를 갖고 시작했기에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연습생 시절

필자가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99년 이었다. 그 이후 일본에 갔다가 2002년에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무명()’이었다.
당시 필자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분이 있었다. 바로 자바 입문서 저술로 유명한 하동훈 님 이었다. 방대한 내용에 자신감 넘치는 설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도 이런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그리고 실제로 그분을 뵙기도 했는데, 무척 설레는 경험이었다).
중학 2학년 때, ‘큰 바위 얼굴’이라는 나다니엘 호손(Nathan iel Hawthorne, 주홍글씨의 작가)의 단편 소설을 배운 적이 있다. 얼굴 큰 사람을 놀리는 데에 쓰이기도 한 제목이지만 그 소설의 요점은 간단했다.


“늘 마음에 품고 있으면, 닮아 가게 마련이다”


평생을 일관되게 ‘큰 바위 얼굴’만 추구하기에 21세기의 오늘날은 변화무쌍하기 그지없지만, 하동훈님은 저의 자바 초년기를 지탱해준 분이다.
그 시기에 나를 이끌어 주신 한 분 더 있다. 톰캣과 스트럿츠의 아버지인 ‘크랙 맥클라한(Craig McClanahan)’이다. 필자가 자바 웹 애플리케이션을 짜기 시작한 1999년에는 톰캣은 없었다. 다만, 그 전신인 JServ라는 아파치 모듈은 있었다. 당시 서블릿을 짜서 돌리고 싶다면 JServ는 아파치와 잘 붙는 대표 솔루션이었고, 바로 그 JServ를 만든 것이 크랙이었다.
필자가 아파치 커미터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아파치 웹 서비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오해는 많이 하시죠 ^^). 사실 필자의 오픈 소스에 대한 개발자로서의 진지한 관심도 리눅스나 아파치 웹 서버가 아닌 JServ로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JSP가 본격적으로 선보이면서 서블릿과 JSP를 묶은 웹 컨테이너로서 톰캣 프로젝트가 아파치에서 시작되었다. 이제는 아파치 웹 서버만큼이나 자바 계에서는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니 그 토대를 마련한 크랙의 공은 지대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아주 단순히도 크랙을 닮고 싶다는 생각에 톰캣 커미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다. 톰캣 개발자 메일링 리스트도 가입해서 보고, 무슨 얘기들을 나누는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자바 개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당시의 필자에게 서블릿이나 JSP가 아닌 서버 기술은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다.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메일링 리스트에 글을 올리려면 반나절씩 걸릴 정도로 의사소통도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필자를 가장 좌절하게 만든 것은 바로 격차였다. 벌써 보이지 않을 만치만큼 앞서 가 있는 톰캣 커미터들과 나 자신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컸던 탓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지만, 그때 저는 완전히 톰캣과 서블릿에 미쳐 있었던 듯하다.


대외 활동 데뷔

언젠가 마소에 개발자의 글쓰기와 번역에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미에 대외활동에 대해서도 고백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이 지면을 통해 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
필자의 컴퓨터 인생을 활짝 열게 해준, 질풍노도의 10대 초반을 함께 해준 PC는 MSX였다. MSX의 게임은 대부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때문에, 필자에게는 일본 문화에 대한 노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일본어를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하루를 셋으로 나누면 한국어, 영어, 일본어를 비슷하게 보게 되었다. 아마도 필자의 개방적인 성격은 그로 인해 형성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캐나다를 다녀오며 영어권 문화 경험을 쌓은 필자는 일본 현지 체험을 해보자는 다음 도전 과제를 스스로에게 제시했다. 때마침 2001년에는 일본의 회사,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필자가재’에 가까웠다.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필자의 생활은 점점 더 갑갑해져 갔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때마침 자바 서블릿 개발자의 바이블이나 다름없던 제이슨 헌터(Jason Hunter)의 『자바 서블릿 프로그래밍(Java Servlet Programming)』 개정판의 번역을 요청받게 되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번역한 이 책은 한국에서 출간되며 개발자들 사이에 내 이름 세 글자를 알리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당시에도 개인 웹 사이트 활동도 활발히 했지만 그때는 인터넷이 지금과 같이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1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오를 때에는 이미 한국에서 많은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2년 10월 티맥스에 합류하기 전까지, 약 반년간의 짧지만 뜨거웠던 ‘독립 자바인(independent Javanese)’ 생활은 필자에게 무척 값진 시간이었다. 전에도 프리랜서로 상당 기간 일했던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졌다.
한국의 개발자들에게 자바를 주제로 하는 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발표가 거듭 될수록 믿을 수도, 그동안 상상해 본적도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발표를 마치고 내려오는 필자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개발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필자는 사인을 해 줄때 이름 뒤에 ‘성공하세요’라는 인사말을 함께 써오고 있다. 고생을 뜻하는 ‘수고하세요’ 보다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상하게도 필자는 평소에는 별로 유머감각이 없는 듯한데 발표를 하기 위해 연단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오버’를 하게 된다. 기술로 사람을 웃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텐데, 당시에 필자의 발표를 듣는 분들(대부분 같은 자바 업계에 있는)의 호의 탓인지 쉽게 동감과 폭소로 이어지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분들의 밝은 얼굴 하나하나가 경험과 지식 부족의 신출내기인 필자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준 듯하다. 이 시점에서 그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재미와 감동의 동시 추구

일본으로 떠나기 전 우연히 알게 된 한 정치학 박사님(이자 모 컨설팅 회사 사장님)은 저를 이렇게 정의하시더군요.


“낭만적인 진보주의자”


서블릿도, 아파치 커뮤니티도, 번역도, 발표도, 즐거움이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이미 해버렸다면 그런 즐거움도 느낄 수 없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1년 전 보금자리를 오픈마루로 옮길 때에도 새로운 즐거움이 있었다.


“내가 쓸 것을 내가 만드는 것”


그동안 미들웨어 개발에 천착했던 저로서는, 최종 사용자의 손끝이 닿는 소프트웨어(웹 서비스)를 만든다는 것은(실은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이라는) 과거로의 회귀를 뜻했다. 하지만 오픈마루에서 필자가 택한 것은 웹 서비스 팀이었다. 웹 서비스를 알기 위해서라도 그 과정은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스프링노트는 필자가 가장 많이 쓰는 소프트웨어가 되었다.
비록 시즌 1을 끝으로 스프링노트를 끝냈지만, 제 관심은 스프링노트를 이용한 웹 사이트 구축으로 발전하였다.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하면서 가장 하기 귀찮은 작업이 바로 프로젝트 공식 사이트 관리와 문서 작성이었다.
스프링노트는 바로바로 쓰기 쉬운 도구로서는 완벽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이트의 구조나 배치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문서 작성과 편집은 스프링노트에서 하지만, 그 문서들을 별도의 사이트로 게시해주는 솔루션을 떠올렸고, 빠른 프로토타이핑과 끈질긴 구애 끝에 오픈마루 첫 텐 웍스(1년의 10주를 자기 프로젝트에 할애하는 것) 프로젝트로 시작할 수 있었다.
스프링북(SpringBook, http://labs.openmaru.com/projects /springbook)은 Xquared(http://labs.openmaru.com/ projects/xquared)에 이은 오픈마루의 두 번째 오픈 소스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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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1> 스프링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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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2> Xquared 한글 홈페이지



스프링북의 첫 적용 사례가 Xquared 프로젝트 사이트라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는데, 덕분에 Xquared 프로젝트 리드인 강규영님으로 부터 많은 피드백을 받아야만 했다. ^^;;;
스프링북은 기본적으로 설치형이지만, 서버 자원이 없으신 분을 위해 시험 서비스로도 제공할 예정이다. 오픈마루의 시험 서비스의 장인 플레이마루(http://playmaru.net)를 통해 아마도 독자 들이 이 글을 보고 있을 즈음에는 스프링북 시험 서비스(http://springbook.playmaru.net)에 접속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1.0이 나온 스프링북의 2.0 버전도 올해 안에 낼 생각이다. 스프링북의 로드맵 페이지(http://labs.openmaru.com/ projects/springbook/pages/512071)를 보면 레일즈 2의 적용에서부터 모바일 디바이스 지원, 구글 기어스(Google Gears) 활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할 일들이 대기 중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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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3> 스프링북의 로드맵 페이지



무작정 스프링북 개발 참여를 독려하기보다, 필자는 먼저 나와 비슷한 필요성을 가진 분들에게 스프링북의 사용부터 권하고 싶다. 즉석 작성과 게시가 가능한 스프링노트+스프링북 콤비가 가져다주는 문서를 만들고 사이트를 꾸미는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부터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 스스로도 앞으로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별로 감이 오질 않는다. 그러던 것이 스프링북을 만들고 나면서, 내가 많이 쓰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핸드폰을 시작으로 노트북과 AV 시스템 같은 전자기기, 일상을 둘러싼 자동차와 가사활동, 집까지. 어디에 어느 정도나 가능 할지는 모르겠지만 닥치는 대로 리스트가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아이템들도 구상되고 있다.

초절정 만능 핸드폰
그 핸드폰에 붙이는 넓은 화면과 키보드
자동 운전-주차 시스템
자동 청소와 세탁


매우 생뚱맞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대책 없는 낭만적 진보주의자의 30대 후반을 채울지도 모르는 아이템들이다.


자주 보면 닮는다

최근에 한 보고서에 따르면 부부는 서로 닮게 된다고 한다. 성격이나 식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외모까지 닮게 된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닮을 수 있는 이유가 너무 단순하고 어처구니없다. 자주 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그 원리를 적용해보았다.
필자가 하루 24시간을 살면서, 뭔가를 보지 않는 약 9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컴퓨터의 화면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컴퓨터는 가장 오래 필자와 함께 지낸 존재다(아마 독자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 필자의 친구는 컴퓨터뿐인가 모양까지 닮아간다면 얼굴이 네모네 지는 걸까 =_=;
물론 자주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에서 일과 일상을 함께 했던 기획 이사님과 티맥스 제우스 팀, 오픈마루 스프링노트 시즌 1 팀 등 참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사람들이 고수라고 부르고 있는 지금 필자의 모습은 그분들이 모습을 오롯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 다양한 특징들을 모두 부를 수 없으니 그냥 그 앞에 대표로 ‘이창신’ 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10월 초 기자가 제안했던 ‘수퍼 개발자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이렇다.


“수퍼 개발자가 되고 싶다면, 수퍼 개발자를 자주 만나세요. 그리고 수퍼 개발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늘 마음속에 그리고 꿈을 꾸세요.”


마지막 제 인사는 ‘성공하세요’입니다.

제공 : DB포탈사이트 DBguide.net